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덜


하버드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덜이 강의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다.

언뜻보기에 '정의'라고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보다 느낌으로 먼저 전달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을 배제한채, 과거 철학자에서부터 근대 철학자들이 순수한 이성만으로 판단한 '정의'에 대해서 마이클 샌덜은 하버드 대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고, 흡수력이 상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강의방식이 '대조'를 통한 토론방법 때문이었다. 흔히 '딜레마'라고 불리우는 대조를 통한 토론 방식으로 학생들을 코너로 몰아간다. 아니 단순하게 코너로 몰아가는 것 이상으로 교수 자신과 철학자, 학생들을 치열한 토론의 장으로 이끈다. 특히나 강의를 진행하는데 있어 현시점에서 논쟁이 될수 있는 실생활의 예제를 사용함으로 몰입도를 한층 높였다.

마이클 샌덜의 말하는 정의에는 3가지가 나오는다(공리적인방법, 자유적인 방법, 칸트와 롤스로 대변되는정언적 혹은 가언적 방법) .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가 발전해가는 과정속에서, 그리고 그 의미가 점점 커져가고 있는 연대적, 국가와 시민사회의 정체성에서도 정의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정치철학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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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셜의 주장 일부는 결혼의 목적 또는 본질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다. 출산을 위한 결혼과 독점적이고 영원한 약속으로서의 결혼이라는 엇갈린 해석 가운데 어느쪽이 더 타당한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두가지 설명 중에 어느 쪽이 전반적으로 기존 혼인법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묻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느 쪽 해석이 영광스러운 미덕을 칭송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무엇을 결혼의 목적으로 생각하는가는 결혼이 칭송하고 지지해야 하는 자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기에 달렸다. 그러다 보면 근본적인 도덕적, 종교적 논쟁을 피할 수 없다. 게이와 레즈비언 관계의 도덕적 직위는 무엇인가?
  마셜은 이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혼인을 이성애 한정한다면 "동성애는 이성애에 비해 천성적으로 불안정하고 영등한 관계이며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는 유해한 고정관념을 공식승인해주는" 꼴이다.
  따라서 동성혼에 찬성하는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이 비차별과 선택의 자유에 의존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누가 결혼할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려면, 결혼의 목적과 결혼이 청송하는 미덕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도덕적 논란이 이는 영역에 도달하는데, 이때 좋은 삶을 두고 대립하는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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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덜 교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도덕철할을 얘기하면서 줄곧 유지했던 중립적인 시각만으로 도덕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도 살수 없고 시민사회에, 교수님이 인용한 말로는 '서정적'인 인간이기에 미덕을 키우고 공공선을 고민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공동선의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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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미덕이라고 하면, 보수적 종교인이 이렇게 살아라, 하고 말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미덕과 공동선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은 그것만이 아니다. 문제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정치를 구상하고, 더불어 그런 문제를 성이나 낙태만이 아니라 경제와 시민의 관심사라는 폭넓은 영역으로 끌어내는 정치를 구상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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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에 대해서 다음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1. 시민 의식, 희생, 봉사
2. 시장의 도덕적 한계 인식
3.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4.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이를 위해서 정부가 좋은 삶에 관한 문제에 공적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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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에 관한 문제에 공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는 시민의 삶을 침해하는 행위이자 자유주의적 공적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해위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의 정치와 법은 도덕적, 종교적 논쟁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압과 배타성을 우려해서다. 일리 있는 우려다. 다문화 사회의 시민들은 도덕과 종교에 이견을 보인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정부가 이러한 이견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정치는 가능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익숙한 정도보다 좀더 적극적으로 시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10 ~ 20년간 우리는 시민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존중한다는 것은 (적어도 정치적 목적에서는) 그 신념을 모른 척하고, 방해하지 않으며, 공적 삶에서 그것을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식의 회피에서 나온 존중은 가짜이기 쉽상이다. 그런 태도는 도덕적 이견을 회피한다기 보다는 억누르는 쪽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반발이나 분노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공개 담론을 줄이고, 이 뉴스에서 저 뉴스로 숨어 다니며 추문이나 자극적인 기사 또는 시답잖은 소식에 매달린다.
  도덕적 이견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 종교적 신렴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적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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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덜 교수를 보고 진보적이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관을 수용하면서 중립적인 입장도 함께 가져가는 도덕을 그리고 그러한 도덕을 정치에 적용하자고 제안하는 철학자일 뿐이다.

그와 더불어 그의 이러한 주장은 한국정치, 사회 전반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마이클 샌들 교수

마이클 샌들 교수




마이클 샌들 교수

마이클 샌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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